페이스북을 하다 우연히 흙수저 빙고 게임이라는 짤을 발견했다.
그리고나서 나는 과연 몇 개나 해당되는지 체크를 해보기 시작했다.
물론 기준이 되는 건 성인이 되기 전이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지금을 기준으로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흙수저는 본인의 재산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부모에게 타고난 재산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던 시절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맞다.
먼저 화장실에 물 받는 대야 있었다.
물을 틀어놓고 쓰면 낭비되는 물이 많다며 빨간 고무대야를 화장실에 두고 받아 썼다.
어린 시절에는 커다란 빨간 고무통에 물을 받고 그걸 욕조 대신으로 쓰기도 했다.
18평 짜리 연립주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겠다.
14년간 살던 그 집은 최근 재개발 돼서 사라졌다.
세뱃돈은 보통 만원씩 받아왔고 무슨 큰 일 있을 때는 5만원 받았던 기억이다.
남들 10만원 넘게 받아왔다는 말 들으면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 했다.
어차피 엄마아빠 다 줘서 큰 의미는 없지만.
알바는 상당히 많이 해봤다.
호프집, 편의점, PC방, 메이플 작업장, 대형마트, 경마장 등.
알바는 흙, 금수저를 떠나서 길진 않더라도 한 달 정도 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건강에 신경쓰기 시작한 건 몸이 아프고 난 뒤였다.
아프지 않는 이상 검진을 받거나 그러시진 않았다.
그 때 미리미리 받았으면 오히려 지금 나갈 돈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는데 당시엔 받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집에 당연히 욕조 없었고 위에 말했듯이 어린시절 가끔 빨간 고무통에 물을 담아 거기 안에 들어가있곤 했다.
그렇게 자라서 그런지 지금은 욕조 있는 집이지만 욕조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
가끔 입욕제를 사도 15분을 넘기기 힘들다.
가끔 집 인증샷 같은 걸 보면 가난한 집은 장판만 아주 조금 나와도 티가 나더라.
엄마가 아무리 집 관리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구린 장판을 커버 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하느라 바빴던 부모님이 취미생활이 있었을리가.
엄마는 집 앞에 있는 산에 갔다오길 좋아했고 아빠는 일하고 밥먹고 자고가 전부였던 기억이다.
자식교육에 집착은 전혀 없었다.
나 스스로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고 시험보는 날은 그냥 학교 빨리 끝나는 날이었다.
수능 전날도 친구들이랑 노래방 갔다가 피씨방 가서 카오스 했다.
아파트로 이사가기 전 까지 계속해서 브라운관 TV였다.
이사 이후 내가 PC방 알바로 번 돈을 모아 PDP TV를 샀던 기억이다.
냉동실 안에 비닐안에 든 무언가는 부모님댁에 갈 때마다 아직도 있다.
양념 같은 것도 있고 마른 멸치 같은 것도 있는데 나는 그것을 굉장히 극혐하기 때문에 냉동실은 열지도 않았다.
음식 남기지 말라는 잔소리.
밥 몇 톨 남기기만 해도 싹싹 긁어먹으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 덕분에 지금도 음식 남길 때 마다 죄책감을 느껴 이렇게 살이 쪘나보다.
고기는 정말 국거리 위주로 먹었던 것 같다.
어쩌다 목살 구워먹을 때면 상추에 고기 두 개 집어넣었다가 잔소리 들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 때의 보상심리로 고기구이 왕창 먹는데 그래서 이렇게 살이 쪘나보다.
중고나라 거래는 지금도 하고 있다.
물건을 사면 항상 케이스와 구성품을 챙기는데 언젠가 중고로 팔 때를 대비해서다.
만나면 항상 어플을 통해 계좌이체로 거래를 하는데 맞는지 확인해달라며 어플을 보여주면 다들 잔액부분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는, 그 모습을 보는 재미로 한다.
이혼 안 했다.
금수저 편부모 가정도 많을텐데 이게 왜 들어가는진 모르겠지만 사실 이거 말고 다른 보기 중에서도 경제력과 상관 없는 게 많으니 굳이 따지진 않겠다.
신발은 돈을 떠나서 원래 잘 안 갈아 신는다.
난 아직도 아파트에 신발장 수납공간이 왜 이리 넓은지 잘 모르겠다.
나에게 운동화는 항상 한두켤레였고 요즘엔 주로 슬리퍼만 신는데 2~3년에 신발 하나 살까말까 한다.
식탁 아래 식탁보가 비닐로 됨?
식탁이 없었기 때문에 체크를 할 수가 없다.
집에 비데 없었다.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물 적약한다고 화장실 변기 뒤에 벽돌 넣었다.
에어컨은 아파트로 이사를 간 뒤에야 샀는데 여름에 하루, 이틀 전가족 다 있을 때만 틀거나 아니면 아예 안 틀고 지나간 여름도 있었다.
저럴 거면 대체 왜 샀는지 이해를 못 했다.
본가가 월세나 1억 이하 전세…
당시 매매가 5천만원 짜리 자가였다.
인터넷 쇼핑시 최저가 찾기는 지금도 하고 있다.
만 얼마 짜리 물건 찾으면서도 몇백원이라도 더 싼 거 찾으려고 노력한다.
아빠는 내가 차를 사주기 전 까지 12년된 리오를 타고 있었다.
그 전에는 1톤 포터차량을 몰고 있었다.
난 아직도 고등학교 때 입던 퓨마 짝퉁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에 들었던 버릇이 아직도 안 없어져서 물건을 잘 버리질 못 한다.
어차피 평생 안 입을 걸 알면서도 못 버린다.
그래도 다행히 엄마가 집 관리를 잘해서 집에 곰팡이는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뭐 흙수저 오브 흙수저였다.
이래서 내가 돈을 펑펑 쓰고자하면 펑펑 쓰지만 안 쓰고 존버하자고 마음 먹으면 또 귀신같이 안 쓰고도 잘 산다.
이런 거에 상처 받는 사람도 있다는데 난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선생이 대놓고 집에 돈 없어서 급식비 지원 받아야 하는 사람 손들라고 해도 대놓고 번쩍 들었었다.
뭐 내가 잘못해서 가난했나?
그렇다고 부모님이 잘못해서 가난했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내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